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 투쟁 (문단 편집) === 배경 === [[보불전쟁]]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자신들의 주도 하에 [[독일 제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역사가 길었던 [[바이에른 왕국]]과 [[라인란트]]를 비롯한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여전히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통일 독일에 대해서 마뜩찮아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해서 [[가톨릭 중앙당]]이 제국의회에서 세를 불려나갔고, 이들은 국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교회를 국가의 통제 밑에 놓으려고 했던 비스마르크의 정국 구상과는 대립했기에 비스마르크와 중앙당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갔다.[* 이는 단순히 정교분리 뿐만이 아니라, 중앙당이 친노동자 성향을 띄었던 점도 큰 몫을 했다. [[가톨릭교회]]는 [[산업혁명]] 시기에 '전통'을 고수하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해왔는데 중앙당도 이러한 입장을 따라서 자본가를 비판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http://www.cbck.or.kr/Documents/Pope/Read?doc=400338&doctype=1&gb=T&search=%EC%82%AC%ED%83%9C|〈새로운 사태{{{-2 RERUM NOVARUM}}}〉]]를 보면 반공적이면서도 노동 조합에 호의적인 당시 가톨릭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이러한 와중에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지지층인 [[프로이센]]의 왕실과 [[융커]] 사이에서도 가톨릭에 온건한 접근을 주장하는 세력보다는 '이 참에 가톨릭 세력에 본 때를 한 번 보여줘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상황은 두 세력 간의 [[치킨 게임]]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런 반감은 [[독일]] 통일의 와중에 불거진 갈등 때문에 뿌리가 깊어졌다. 독일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이 [[오스트리아]]에 있다고 보았으며, 600만 명의 오스트리아 독일인(주로 가톨릭 신자)을 배제하는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 1871년 이후 가톨릭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제국의회에서 야당에 포진한 3대 소수 민족(폴란드인, 알자스인, 덴마크인) 중 2개 민족 대표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더 깊어졌다. 비스마르크는 동프로이센의 [[폴란드인]] 가톨릭 신자 250만 명의 정치적 '불충'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와 교회의 네트워크가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에 깊이 연루되었다고 의심했다. >이 같은 우려는 새로운 국민-국가 내에서 전보다 더 파괴적인 요인으로 잠재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새롭게 일군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기적'이거나 역사적으로 진화한 통일 국가가 아니라 4년간 외교 전쟁 끝에 나온 고도로 인위적인 산물이었다.[* (책 속 주석) Lerman, ''Bismarck'', p. 176.] 프로이센의 역사에서 종종 그랬듯, 군주제의 성공은 인상적인 모습 못지않게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었다. 너무 빠른 시간에 합쳐진 신생 제국은 쉽게 흩어질 수 있으며, 내부로부터의 분열을 막아줄 정치적·문화적 응집력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런 불안이 과장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실감하는 것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가톨릭을 국가적 단합을 방해할 가장 무서운 국내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였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3-764쪽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장된 불안으로 보일 수 있어도, 당시 비스마르크 입장에서는 '소독일안'에 냉담하며 소수민족인 알자스인과 폴란드인의 신앙인 제국 내 가톨릭이 신생 독일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자유주의 노선의 신문과 잡지는 가톨릭 신자들을 (자유로운 양심을 가진 남성 납세자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주의 세계와 반대되는) 비굴한 꼭두각시 집단으로 묘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반교권적 이미지로 가득한 동물우화집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주의 잡지에 실린 풍자화 중에는 교활하고 마른 [[예수회]]원과 호색하고 살찐 [[사제]]들 그림이 많았다.(성직자의 [[수단(의복)|새까만 옷]]은 만화가들이 기교를 부리기 쉬운 대상이었다). 이런 그림은 교구사제가 고해성사를 맡는 걸 비난하거나 [[수녀]]들의 성적 예의범절을 의문시함으로써 가부장적 핵가족을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의 믿음을 표현했다. 새로운 가톨릭 질서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이 맡은 중요한 지위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과 사제의 독신(혹은 비독신) 생활에 대한 그들의 호색적인 관심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반가톨릭 운동의 형성에 결정적이라고 할 '남성성'에 대한 (늘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집착을 드러냈다.[* (책 속 주석)Michael Gross, ''The War Against Catholicism. Liberalism and the Anti-Catholic Imagination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Ann Arbor, MI, 2004); Rosín Healy, ''The Jesuit Spectre in Imperial Germany'' (Leiden, 2003)]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4-765쪽 또한 가톨릭을 비난하는 가운데 자유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비스마르크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185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파견된 기간에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가톨릭 신앙이 남부 독일에서 가장 큰 '프로이센의 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세기 중엽의 가톨릭이 점점 로마 중심으로 전개되는 흐름에서, 가톨릭의 복고적인 경건주의와 보란 듯이 자행되는 [[성지순례]], 공개적인 축제의 광경을 목도하며 그는 극도의 혐오감을 품었다. 실제로 그는 이런 모습이 "지극히 혐오스럽고 교활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위선적인 가톨릭 신앙"으로서 "주제넘은 교리를 하느님의 계시로 왜곡하고 우상숭배를 속세를 지배하기 위한 기반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책 속 주석)Pflanze, ''Bismarck'', vol.1.,p. 368, and vol.2,p.188.] 이런 의혹에는 다양한 시각이 뒤섞여 있었다. 가톨릭 복고 특유의 현상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경건주의적인 영성으로 두드러진) 프로테스탄트적인 경멸, 일종의 어중간한 독일 관념론, 그리고 심리를 조종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교회의 능력에 대한 (거의 편집증과 구분이 안 되는) 정치적 불안 등 등.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2-763쪽 마지막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비스마르크 개인의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가톨릭에 대한 경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